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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라 霞修羅 HUSTLER - 020

부제: 비리아도(秘理雅道) 비밀스런 이치를 간직한 우아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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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예신문
기사입력 201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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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구뉴스이미지. "꼬인다, 꼬여" 레이싱모델 최지향.(출처:고뉴스, Naver)
“많은 승려들이 당무에 빠져 수행을 소홀히 하게 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예불(禮佛)을 거르기도 하고, 밤을 새워 당무를 하다가 아침에 꾸벅꾸벅 조는 일도 많아졌지. 그래서 다마조사는 사내(寺內)에서의 당무 수련을 금지했어. 하지만 그냥 없애 버리긴 아까웠지. 그래서 비전(秘傳)으로 일부에게만 가르쳐서 맥을 잇도록 했지. 그 때 정해진 명칭이 비리아도(秘理雅道)야.”

“비밀스런[秘] 이치[理]가 담긴 우아한[雅] 기예[道]라… 정말 멋진 명칭이군요.”

상천이 무릎을 쳤다.

"그렇다. 선현(先賢)들은 이처럼 이름 하나 짓는 데도 소홀함이 없었어. 이런 연유로 비리아도는, 지금도 불가에 전하는 호흡법의 이치를 담은 혜명경(慧命經)처럼 선발된 일부 승려들에게만  전해졌는데…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당(唐)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소림 십삼 곤승(十三棍僧)도 연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봉이 아닌 곤(棍)을 사용했거든. 곤이란 봉과는 달리 위아래의 두께가 차이 나는 무기니까…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간과 비슷하지."

“특히 무승(武僧)들이 초식의 정교함과 내공을 기르기 위해 수련했을 듯싶군요.”

"하지만 비밀스럽게 전해 오던 당무의 맥은 수차례의 전란과 국가적인 위기를 겪으며 끊어졌고… 훗날 벽목국(碧目國)의 사람들이 다마조사의 유물(遺物) 가운데 붉은 공과 흰 공을 발견하여 가지고 갔지. 그리고 몇몇 서적에 남은 사료(史料)를 근거로 당무를 재현(再現)하기에 이르렀어. 네가 말했듯이 명칭도 비리아도를 음차(音借)한 빌리어드(Billiard)라고 했고… 즉 시작은 동양이었지만 이를 발전시켜 세계에 퍼뜨린 것은 서양인들이었지."

오랜 동안 말을 해서 힘이 드는지 양봉환은 다시 몇 차례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됐다. 염려하지 말거라.”

양봉환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전(失傳)되었던 당무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불행하게도 동영(東瀛)을 통해서였지. 역수입이 된 거야.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당무에는 동영식 용어가 많이 쓰이고 있어. 그나마 제대로도 아니고 와전(訛傳)된 것이 많지.”

“저도 뜻을 모르고 그냥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 많았는데…….”

상천이 머리를 긁적였다.

“해동구림맹(海東球林盟 Korea Billiards Federation)에서는 우리말로 바꾼 용어를 보급하려 애쓰고 있지만…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동영의 용어를 써왔기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 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야.”

“앞으로는 우리말로 된 용어를 써서 무관에 붙여 두어야겠어요.”

상천의 말에 사부는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다시 우리나라 초창기의 당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무는 구한말(舊韓末) 그러니까 대한제국 시절에 전래되었지. 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을 보면, 무력 1382년인 융희(隆熙) 2년에 궁중의 어전놀이로서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지.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傳) 동행각(東行閣)에 비무대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옥돌(玉突)이라고 불렀다고 해. 특히 고종 황제는 어의(御醫)의 권유로 건강을 위해 당무를 수련했다고 하며, 공력 수위는 약 삼 갑자(甲子)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거의 오 갑자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으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수였다고 하겠지.”

“황실에서도 무맥(武脈)을 이어온 것이군요.”

“그 때 어전 교련(敎鍊 Coach)은 전상운(全相雲)이라는 전대기인(前代奇人)이었고, 황제가 칠 때마다 환관이 옆에서 청분(靑粉 Chalk)을 칠해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일반인도 당무를 수련할 수 있는 구술무관이 생겼는데, 동영인이 운영하던 파주정이 있었고, 무력 1397년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최초의 무관인 무궁헌(無窮軒)이 생겼다고 한다. 무력 1412년 조선일보 4월 27일자에는 이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지. ‘껨도리’로 일하는 여성의 사진과 함께 말이다.”
 
- 홀딱 반하도록 재미잇는 노리… ‘다마’가 조선 땅을 휩쓸다
 
“넓다란 껨상 우엔 맑아코 흰 탐스런 다마가 매낀매낀 구을고, 젊잔흔 신사가 가느다란 막대로 톡톡 냅다 지르는 모양은 차므로 화사(華奢)와 우미(優美)를 함게한 포-즈….”

옥돌장(玉突場), 즉 당구장 모습이다. 일찍이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했던 김옥균도 당구에 한숙(嫺熟· 단련되어 익숙함)’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무력 1399년 별건곤 11월호), 일본 유학을 갓다온 사람치고 당구를 못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무력 1402년 별건곤 4월호). 일본인 밀집지역인 남촌에만 있던 신식 카페나 빠가 무력 1400년대 후반 들어 북촌으로 유입될 때, 당구장도 덩달아 일본 유학생을 넘어 일반인에게도 퍼졌다.

당구에 대한 이미지는 건전한 취미보다는 도박에 가까웠다. 당구에 빠져 매일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둔 주부가 ‘도대체 당구가 뭐냐?’고 부인난에 묻자, ‘얌전한 사람이라도 여기에 반하면 날마다 안 치고는 못백일만치 자미잇는 경기’요, ‘너무 골돌히 반하면 딴 볼일이 전페가 되므로 살림사리가 자연 억망이 될 수도 있다’고 답한 오락이었다(무력 1410년 2월 17일자).

실제로 ‘신사 도박단의 탄로로 시내 각 옥돌장에 대철퇴(大鐵槌)’, ‘신사도박단 수십명 검거’ 같은 기사도 자주 등장했다.(무력 1412년 8월 15, 25일자) 그래서 원산에선 주민들이 ‘결국은 도박이 되는 동시에, 근처에 불량배가 위집하야 아동교육상 공중풍긔상 해를 끼치는 일이 많다’며, 옥돌장 허가취소를 진정하기도 했다(무력 1408년 7월 27일자).

그럼에도 총독부의 1938년 4~11월 ‘입장세액을 통해 본 도시인 취미’를 보면, 연극이나 영화 같은 ‘관람적 오락물’의 입장료와 입장세의 최고는 연극, 마짱(마작)이나 당구 같은 ‘기술적 오락물’의 최고는 당구였다. ‘구경은 연극이 좋고, 놀기는 당구가 제일’이었던 것(무력 1412년 1월 27일자).

당구 인구가 많았던 것은, ‘가장 깨끗하고 점잔허서 가위 신사의 유희인 까닭도 잇고, 또 돈이 적게 들어 불과 일원 이내로 머리와 육체를 함께 쉴 수 잇고, 더 큰 이유는 아주 홀딱 반하도록 재미잇는 점’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해도 조흘 노름’으로 실제로 여자도 당구장을 찾았다(무력 1412년 4월 27일자).

그러나 학생 기강확립을 위해 인천부가 ‘불량학생 청소 공작’을 실시하면서 카페나 바는 물론 당구장도 출입을 금지한 것을 보면(무력 1413년 2월 9일자), 당구에는 ‘불량’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중에서>
 
해동의 구예 비사를 듣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인시(寅時) 가까이 되어 있었다.

사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상천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이처럼 해동에서도 구예의 맥은 면면히 이어진 것이다. 자, 시간이 늦었구나. 고단할 테니 그만 자거라.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밤에 다시 들려주마.”

상천은 밤을 새워서라도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었지만, 사부의 힘들어하는 모습에 방의 불을 끌 수밖에 없었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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